Statement

점토, 종이 그리고 점

단아한 푸른빛과 고요한 흰색의 단색조 회화가 마치 하나의 또 다른 점과 같이 흰 벽면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도자판 위를 수많은 점으로 채운 유재웅의 도자회화는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반복되는 점을 따라 이동하는 시선에 의해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는 것같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캔버스를 대체한 한지점토로 제작된 판 위에 슬립으로 점을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는 사회적 존재 너머의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터널을 지나는 과정이며, 채움으로 비워내는 작가 자신만의 수행이다.

새로운 미술사조는 당대 사회적, 철학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미美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기존의 체제를 거부하고 색다른 방법이 시도되면서 나타난다. 재현의 대상이 신의 형상에서 인간의 현실로 이행하면서 사실주의가 시작되었고,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회화에서 전쟁의 상처와 같은 내면의 감각을 담아내는 표현주의로 이행하면서 미술은 또 다른 변혁을 이루었다. 기존의 관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도가 시행되기까지의 몸살은 늘 역사에 기록되었다. 흙의 예술은 개념적 전환과 더불어 기술적 도약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장으로 이행이 가능하기에, 회화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 변화되었다. 현재의 도자예술은 흙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에 의해 조각과 회화, 설치와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와의 융합이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흙의 예술이 유약실험과 매체의 성질에 대한 탐구를 지나 크기와 색상의 한계를 탈피하고, 기존의 범주를 확장시켜 미술 내에서 도자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였던 과거와 달리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미술담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로 진입한 듯 보인다. 신진작가 유재웅의 도화陶畫 역시 한국의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단색화의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이후를 이야기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한 유재웅은 도자예술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후 회화적 추상을 도자로 구현하기 위해 평면의 판과 점을 활용하여 도화작업을 하게 되었다. 정적인 성격과 자신에 대한 성찰은 차분한 색상과 반복되는 작업과정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의 초기 도화는 ‘도자’라는 범주의 탈피를 위해 평면 위에 사발을 그리고 다시 유약을 덧칠하여 사발의 형상을 지우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도자가 지닌 시간과 반복작업 그리고 흙이라는 성질에 집중하면서도 ‘빚다’와 ‘입체’를 해체하고자 캐스팅으로 판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캐스팅은 하나의 판을 제작하는 데 한계가 있기에 그는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 한지를 물에 풀어 점토와 섞은 후 넓은 종이나 천 위에 한지점토를 켜켜이 바르고 두드리는 작업과정을 반복하여 작가만의 캔버스를 제작하였다. 한지점토 판은 섬유질에 의해 균열과 평면의 왜곡을 방지하고 기존의 두껍고 무거운 기벽의 한계를 벗어났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든 한지점토 판은 본격적으로 작가의 수행 혹은 명상을 위한 바탕이 된다. 유화 붓을 이용하여 동일한 크기와 균일한 간격으로 찍힌 점은 작가가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의 흔적이다.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 시스템 내에서 관계로 증명되는 인물과 같은 모든 수식어를 떨쳐낸 내면의 자신에 집중하기 위해 작가는 반복되는 작업을 성찰하듯 이어간다. 그는 이 과정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붓의 크기를 조절해 가면서 보다 더 많은 점을 일정하게 찍어낸다. 단색화의 수행적인 행위가 자아와 사물의 일치를 의미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하였다면, 유재웅의 단색조 도화는 모든 표현과 색의 화려함을 덜어내어 절대적 자아가 지니는 욕심과 집착을 지양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향한다. 작가는 거대한 단어가 지니는 권위와 무게도 버리기 위해 이를 시쳇말로 ‘멍 때리기’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서 예의 일필휘지一筆揮之 안에 담긴 깊이와 힘의 조절을 자신의 도화에 담고자 의도하나 화려함 보다는 선과 면의 가장 기초 단위인 점으로 이를 표현한다. 찍힌 점은 최근에는 하나의 오브제로 진화되었으며, 작가는 여러 오브제들을 일정하게 설치하여 벽면 자체를 캔버스로 활용하는 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평면과 입체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발전하는 양상이다. 그는 작품의 사이즈를 키워 보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중이라 말한다.

유재웅의 단색조 도화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에서 점을 찍었으나, 흙과 종이, 평면과 입체, 물아物我와 무아無我의 경계를 오가며 보다 큰 담론으로 확장될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는 제작 기법에 대한 고민과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뿐 아니라 한국화를 배우는 작가의 의지,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바탕이 되었다. ‘점’이라는 기본 단위로 환원된 그의 도화가 공간 전체로 확장되어 전시되는 날을 고대한다. 단색조의 도화가 앞으로는 흙과 종이를 매체로 작가의 내면과 자아성찰의 표현에서 나아가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하여 보다 확장된 개념을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글. 이소현 현대미술, 현대도예 연구